우리나라 동쪽 끝 섬, 울릉도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마침 일요일이었던 터라, 업무상 가깝게 교류하고 있던 지역 주민의 손에 이끌려 어느 마을의 작은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얼떨결에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모두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도 초대를 받게 되었는데, 교회 내부에 마련된 공동 식당에서 생전 처음 보는 풍경과 마주했다. 그 식당에는 세로로 길게 두 줄의 식탁이 마련되어있었는데, 한 줄에는 남자들이, 다른 한 줄에는 여자들이 각자의 식판을 앞에 두고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남녀가 나란하게 구분된 밥상에는 한 치의 오차가 없었는데, 뭍에서 배를 타고 출장 온 사람들로 잠시 어그러졌다. 남녀가 한 테이블에 섞여서 밥을 먹는 건 나 그리고 함께 출장 중인 동료들뿐이었다.
그 어색하고 떨떠름했던 섬마을 교회에서의 밥상 풍경을 다시 꺼내어보는 건, 남해 시골 마을에서 마주한 밥상 풍경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서 남해로 이주한 뒤, 크고 작은 마을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마을 어르신들과 식사를 함께 하고서야 알아차렸다. 남녀가 따로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풍경이 어느 시골 마을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곳이 동쪽 끝 섬 울릉도이든, 남쪽 끝 섬 남해이든, 시골 밥상에는 앉는 순서와 자리가 철저하게 정해져 있었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인지 혹은 차려진 밥상을 받는 사람인지는 나이에 따라 혹은 성별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었다.
슬프게도 30대이면서 여성인 나는, 밥상머리에서 가장 서열이 낮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마을에서는 두 번의 노제가 있었다. 그때마다 마을 부녀회가 중심이 되어, 마을에서 가장 젊은 여성 그룹, 그래보았자 대부분 60대 전후의 어머니들이 일사분란하게 상을 차리는 데 앞장섰다. 나도 그 틈에 끼여서, 가장 먼저 할아버지들을 위한 상을, 그 다음으로 할머니들을 위한 상을, 그리고선 그 다음 연배의 중장년 남성들을 위한 상을, 그 밖의 손님들을 위하 상을 차리는 일을 도왔다. 마을 회관을 꽉 채울 만큼 많은 이들이 밥을 먹는 동안 수시로 밥상마다 부족한 것들을 여러 번 채우는 것을 반복한 끝에야, 어머니들의 틈에 끼어 나도 같이 밥 한술을 그제야 뜰 수 있었다. 가장 늦게 밥상 앞에 앉았지만, 가장 빨리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야하는 일도 이곳에서는 자연스럽다. 차린 밥상을 다시 순서대로 모두 정리하고 나면, 제사는 그제야 끝이 났다.
처음에는 의도치 않게 정해진 서열을 어지럽힌 적도 있었다. 지난 가을, 마을 어르신들과 다 함께 관광버스 한 대에 몸을 실고서 가을맞이 소풍을 근교로 떠났다. 마침 그곳 역시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었던 터라, 수산물 센터에 들리게 되었다. 그리고선 야외 정자에서 예정에 없던 간식 시간이 시작되었다. 횟집에서 갓 떠온 생선회와 술이 오늘의 간식. 옹기 정기 작은 정자에 둘러 모여 회를 집어먹었는데, 회를 우물우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마을 어머님들은 다 회를 안 드시고 계시는 것이다. 여러 번 권해도 젓가락을 안 들고 계시기에 혼자 속으로 ‘왜 회를 안 드시지? 다들 회를 안 좋아하시나?’ 했는데, 아니었다. 어머니들은 자기들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깥양반들이 얼마간 먹고 자리를 비우고서야, 어머니들이 정자를 차지하고서 회를 드시길 시작했다. 먼저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해댔던 나는 그때 얼마나 당혹스럽고, 어머님들의 눈치가 보였는지 모른다.
내가 지역으로 이주한 후 밥상 앞에서 여러 번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 순서와 구분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라기보다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숨김없고, 매끄럽게, 이곳에서 평범한 일상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적어도 나이 혹은 성별에 따른 위계질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일컬어졌고, 혹여 잔존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게 ‘숨겨야하는 것’이었으며, 누구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매끄러울 수 없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대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소지를 이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이주를 결심할 때에도, 이주를 한 뒤에도, 나 역시 차마 알지 못했다. 내가 매일 매일 변화하기 바쁜 대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로 이주한다는 것이 다르게 말하면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것들, 때론 정체된 것들을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평등’ 대신 ‘차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분명히 같은 나라임에도,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때론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이곳에서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내가 지금껏 거부해온 것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고, 내가 관철해온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이주를 꿈꾸는 각자에게 남은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