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도 높은 삶에서 빈틈 있는 여정의 시작 '크루그 스테이'
김지연
디자이너
동네
경상북도 경주시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지역과 관계 맺는 시작이라고 말하는 '크루그 스테이'의 김지연 님
"서울은 여행하기 좋은 도시 같아요"
경주에 오기 전 서울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작은 건축 사무소에서 공간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주로 공공기관이나 다수가 이용하는 커뮤니티 공간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일을 했어요.
경주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지금은 독채 스테이 공간을 운영하면서 가끔 디자인 일도 하고 있어요. 지난주에 저희가 자주 가는 단골 카페 사장님한테 디자인 일로 연락이 온 게 하나 있는데, 고민 중이에요. 제가 지금 육아를 하는 중이라 여유 시간을 빼서 일을 할 수 있을지, 아직 결정을 못 내렸어요. 경주에서 가장 유명한 로컬 브랜드 카페이고, 저도 너무 좋아하는 곳이라 아무래도 재밌을 거 같은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려고요.
‘크루그’라는 네이밍은 어떻게 만들어진 거예요?
철학자 한병철 선생의 ‘시간의 향기’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krug는 독일어로 항아리, 단지라는 뜻인데 하이데거가 ‘시간의 향기를 담는 공간’, ‘머무르며 정주하는 사색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해요. 카페 브랜딩을 할 당시에 ‘사람, 공간, 시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단어와 꼭 맞는다고 생각했죠.
공간은 어떻게 운영하고 있어요?
저와 동생이 마케팅과 운영에 전반적인 업무를 하고 있고 남편이 공간 관리를 하고 있어요. 시작은 남편과 둘이 했는데 최근에 동생이 같이하게 됐어요. 동생은 경주로 이주한 건 아니고 서울에서 지내면서 같이 하고 있어요. 동생이 공간 운영과 마케팅 일에 관심이 있어서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저한테 먼저 제안했어요. 아무래도 동생이 저보다 MZ 세대의 감성을 더 잘 알고 있어서 이것, 저것 알려 주고 있어요. 일단, 가입해야 하는 게 많더라고요. (웃음)
가족과 같이 일은 하는 건 어떠세요?
대부분 어렵다고 하던데요. 저는 오히려 좋았어요. 로컬에서 일을 하면서 한계점을 느꼈던 게 혼자 결정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았거든요. 남편은 이 분야가 전공이 아니다 보니 제 경험이 우선돼서 결정하거나 감각으로만 결정해야 할 때가 많았어요. 그때마다 결정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동생이 같이하면서 셋이 결정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포항과 서울에 오가면서 5도 2촌 생활을 하던 시기가 경주로 이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경주로 이주하기 전에 포항에서 1년 동안 살았어요. 결혼하고 남편이 포항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같이 포항으로 내려왔죠. 저도 1년 동안 일을 쉬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후에 다니던 회사로 다시 복귀하면서 5도 2촌의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평일에는 서울에 있는 부모님 댁에서 지내면서 출퇴근했고 주말에 포항에 내려와서 남편과 시간을 보냈어요. 포항이 시골도 아니었는데, 서울과 포항을 오가면서 서울에서 지내는 5일의 시간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30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굉장히 빨리 변하는 서울의 루틴이 전혀 거부감이 없었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는데 매일 타던 지하철, 버스 서울의 공기까지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제야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서울에서는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로의 삶과 일상은 서울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것들을 경험하며 살아보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이주할 지역을 고민하게 되었어요. 저는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을 통해 위로받는 게 커서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포항에서 지낼 때 남편과 주말마다 자주 놀러 갔던 경주에서 살고 있네요.
경주에 오고나서 서울이 그립거나 생각나지는 않았나요?
문화적인 갈증을 느낄 때는 가끔요? 서울에서는 전시나 트렌디한 공간을 자주 찾아다녔는데, 경주는 그 흔한 미술관에 딱 하나 있어요. 그거마저도 계속 똑같은 전시를 하고 있어서 미술관을 가고 싶을 때는 조금 생각나긴 해요. 그 외에는 딱히 그립지는 않네요. (웃음) 서울은 여행으로 가고 싶어요. 갈 때마다 늘 새롭고 자극도 다양해서 서울은 여행하기에 좋은 도시 같아요.
"지역과 느슨한 관계로 연결되고 싶었어요"
경주에서 크루그 스테이를 운영하기 전에, 크루그 카페도 운영했는데 워라밸은 어떠셨어요?
12시간 이상 카페를 운영했어요. (웃음) 저희가 하는 일이 많기도 했어요. 커피 로스팅도 하고 빵도 굽다 보니까 12시간 채우더라고요. 그때 갇혀있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카페가 자리한 위치가 자연을 마주하는 풍광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공간의 위치를 정할 때 한번 올 사람이 아니라 자주 올 수 있는 지역 분들을 대상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좀 더 안쪽으로 좀 더 안쪽으로 들어오다 보니 법원 근처까지 오게 됐어요. 카페에 있다 보면 여기가 서울인지 경주인지 헷갈릴 때도 여러 번 있었어요. 이럴려고 경주에 온 건 아닌데 라는 생각도 정말 많이 했고요. 카페를 운영하면서 열정만큼 체력이 따라 주지 않은 것도 있었고, 남편과 임신과 육아를 고민하던 시기라 현실적으로 카페를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년 정도 운영하고 그만하게 됐어요.
경주 걷기의 말들이라는 책을 만드셨는데 만들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책을 출판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경주로 이주해서 카페를 만들기 전까지 경제적으로는 부족했지만, 시간이 많았어요. 그때 서로를 시간 부자라고 불렀어요. (웃음) 시간이 많아서 이 지역을 한번 걸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이 동네를 걷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게 계기가 되었네요. 처음에는 둘이 걷다가, 걷기를 좋아하는 지인과 함께 셋이 반년 동안 매일 1만 보를 넘게 걸었어요. 만 보씩 걸으면서 경주라는 지역을 여기저기 가본 거죠. 그러면서 그때 찍은 사진과 나눈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까 이상하고 웃긴 마음이 드는 게 잘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더라고요. (웃음) 어느 날 남편이 저에게 기록을 책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땐 큰 관심이 없었어요. 왜냐면 제가 생각했을 때 책이라는 건 스스로 고찰한 것들을 글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아직 담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저 말고 그 둘은 담고 싶은 뭔가가 많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처음 제안했을 때는, 둘이 만들라고 하고 저는 하지 않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남편이 그럼, 디자인만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저는 디자인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옆에서 남편이 알겠다고 말하면서 한글 문서를 켜고 있더라고요. 줘 봐. 하고 인디자인을 켰죠. 남편이 한글을 켠 건 작전이였던 거 같아요. 그 둘은 저를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웃음)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경주의 첫인상을 글로 남겨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황성공원, 시간과 나란히 걷다’ 한 챕터를 쓰게 됐어요.
카페를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었나요?
책 인쇄가 나오고 그다음 날에 온 손님이 기억나요. 책을 원래 출판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고 우리만의 기록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책을 출판하게 됐고, 누가 이 책을 살까 하는 불안감에 최소 수량으로 인쇄했어요. (웃음) 책이 나온 후, 제일 먼저 카페에 배치했어요. 주문받는 곳 옆에 배치했는데, 어떤 중년 여성 손님이 커피를 주문하면서 책을 보시더라고요. 왠지 모르게 떨렸어요. 그 자리에서 책을 오래 보다가 가셨어요. 그 다음 날 어떤 남자분이 오시더니 75권을 덜컥 사 가는 거에요. 남편과 깜짝 놀랐죠. 알고 봤더니 어제 책을 살펴보던 중년 여성 분의 부탁으로 구매한 거고, 그 분이 인근에 있는 검찰의 지청장이라고 하시더라고요. 후배 검사분들 나눠 주려고 75권이나 사 가신 거 같았어요. 덕분에 그날 오후에 바로 재인쇄를 맡겼지요. (웃음) 그리고 얼마 있다가 그 지청장분이 책을 다 읽고 저희 가게에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생각하는 공간에 대한 생각이나, 남편의 글을 읽고는 꼭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면서 요즘은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요즘 마음은 어떤지 궁금하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또 다른 검사들도 한 번씩 와서 책 너무 잘 봤다며 인사 해주는 경우도 많았고요. 지청장분이 그전에 왔을 때는 그냥 주문만 하고 별 얘기를 안 하고 그냥 갔었는데 책을 매개로 이렇게 새로운 관계도 이어지고 신기했어요. 카페 위치가 빌딩들 사이에 있어서 유리창을 통해 보면 거리가 조금 삭막한데, 카페 바로 옆에다가 목련나무를 심어주셨어요. 물론 저희 때문에 심어 준 건 아니고 원래 심었어야 하는 건데, 어디 어디 위치를 말해 주시면서 내년 되면 거리가 좀 괜찮을 거라며 이야기해 주시는데 되게 고맙더라고요. 그 마음이. 이 공간을 되게 좋아해 주는 게 느껴지고, 우리를 좋아하는 게 느껴졌어요. 사실 책 추천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우리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봐주고 또 누군가에게 추천을 해줬다는 게 고마웠어요. 응원과 큰 위로를 얻었죠. 그리고 그분은 서울로 떠나셨는데 목련이 필 때 쯤 또 생각날 거 같아요.
책에서 ‘좋은 공간이란,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곳’이라는 문구를 봤어요. 어떤 맥락에서 말씀하신건가요?
20대에 여러 친구랑 자주 갔던 동네 카페가 있었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때 처음으로 공간이 사라져서 슬픔을 느꼈던 거 같아요. '공간이 사라지는데 왜 슬프지?' 생각해보니 공간이 사라지는 게 친구들과 나눴던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그 이후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달라졌던 것 같아요. 가구, 재료 등 보여지는 것으로 공간을 바라봤는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머무는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그때부터 시작한 거 같아요. 지금 제가 자주 가는 공간들도 그래요. 커피 내려주는 사장님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곳이요. 느슨한 관계로 연결되는 공간을 자주 찾아가는 거 같아요. 그게 제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같고요.
"경주는 걷기 좋은 도시예요“
경주는 어떤 동네 같아요?
고즈넉하고 자연이 아름답고 계절감을 잘 느낄 수 있는 동네 같아요. 경주는 걷기가 좋아서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계절을 느낄 수 있어요.
경주가 걷기 좋은 도시라고 하셨는데 이유가 있나요?
일단 경주는 건축물 고도 제한이 있어 높은 건물이 없어요. 그래서 시야에 걸리는 게 별로 없어서 눈이 시원해요. 건물이 빼곡하게 찬 도시 풍경을 보다가 저 멀리까지 탁 틔운 풍경을 보며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봄에 걷기 좋은 산책 코스 또는 공간이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크루그 스테이 위치를 정한 이유기도 한데요. 경주에 사는 로컬만 아는 벚꽃 명소가 있어요. 크루그 스테이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벚꽃이랑 겹벚꽃이 모두 피는 벚꽃길이 있어요. 아는 사람만 오다보니 붐비지 않아요. 벚꽃이 필 무렵 동네 구경하기 아주 좋은 코스랍니다. 봄에 경주를 찾는 분들에게 꼭 추천해 주는 곳이에요.
“걷다 보면 관심사에 있는 것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요”
카페, 스테이 공간 모두 직접 공사하셨다고 들었어요. 경제적인 이유로 직접 하신 거예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우선이긴 했는데요. 공간의 완성도 때문이기도 했어요. 서울과 달리 지방은 시공업체 수도 적고 잘 맞는 업체 찾는 게 힘들어요. 어렵게 찾아 공사를 해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어렵더라고요. 다행히 카페 공사 때는 아는 지인 중에 목공, 타일, 전기까지 다 잘하는 분이 계셔서, 그 분과 남편 둘이 다 했어요. 하지만 스테이 공사할 때는 지인분이 일정이 맞지 않아 남편 혼자 거의 다 해 냈어요.(웃음)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스테이를 직접 공사하면서 많이 성장한 거 같아요. (웃음)
크루그 스테이 공간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교차로요! 경주는 교차로에서 부동산 정보를 확인해요. 스테이 공간이 위치한 곳은 제가 경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동네였어요. 근처에 진평왕릉이 있어서, 진평왕릉이 있는 동네라고 불려요. 여름에 돗자리 펴고 샌드위치 먹으면서 책 읽기에 좋고, 가을에는 멀리까지 펼쳐지는 황금 들녘을 바라보기에 좋아요. 가장 경주다운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여기가 경주에서도 집 값이 많이 비싼 편이라 거의 포기하고 있었어요. 크루그 스테이를 공간을 탐색하려고 정말 매일매일 교차로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이 동네 시세와 맞지 않는 매물이 나온 거예요. 보고 바로 전화해서 다음 날 계약했어요. (웃음) 동네도 잘 알고 있었고, 시세도 잘 알고 있어서 뭐 고민할 게 없었죠.
지역과 느슨하게 관계 맺고,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지연님이 생각하는 지역과 느슨한 관계 맺기의 시작은 무엇일까요?
우선 걷는 거요? (웃음)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관심 분야의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잖아요. 누구는 사람, 누구는 자연. 제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 늘 공간이었어요. 비어 있는 공간들이요. 저는 걷기 시작하면서 지역과 느슨한 친밀감을 느끼게 됐던 거 같아요. 걸으면서 이 동네가 좋다는 걸 알게 됐고, 이 동네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걷다가 찍은 사진과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들어 보기도 했고요. 제가 생각하는 지역과의 느슨한 관계는 맺기는 이런 거 같아요. 자연스럽게 좋아서 하게 되는 것들이요. 그게 작은 거여도 상관없는 것 같아요. 저처럼 사진 찍는 거일 수도 있고요. 이곳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 그게 지역과 관계 맺는 시작 같아요. 그리고 그건 느슨함을 통해서만 나오는 거 같아요. (웃음) 느슨한 관계는 부담이 없으니까요.
크루그 스테이가 'pick'한 동네 공간
카페 커피 플레이스경주 여행을 오신다면. 이 곳에서 큰 창을 통해 봉황대를 바라보며 마시는 라떼 한잔이 여행의 시작이 되면 좋을 거 같아요.
최영화빵얇은 피를 좋아하신다면 최영화 빵을 드셔보세요. 매장 안에 세트 포장만 진열되어 있어서 잘 모르시는데, 개 당 천원씩 하나도 팔아요. 달지 않고 정말 맛있어요.
황성공원4계절. 어느 계절에 가도 좋은 곳이에요. 오솔길과 소나무 숲 사이사이를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천천히 오래 걷고 싶은 곳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