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일상문화 안내서
03. 우리마을 가장 큰 어르신, 당산나무 할아버지
권진영
남해 귀촌 1년차
동네
남해 두모마을
그 곁에서 나도 조용히 당산나무 할아버지에게 소원을 빌었다.
생업도 그만두고서 낯선 곳으로 이주해온 뒤 한 치 앞도 모를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말이다.
우리 마을에는 꼭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이 있다.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라고 불린다. 그것도 그냥 할아버지가 아니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높으신 분이다. 언젠가 다른 누군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시골 바닷가 마을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큰 고민 없이 늘 그 ‘할아버지’라고 대답했다. 매일 보는 푸른 바다도, 남해의 명산으로서 마을 어디서든 우뚝 솟은 모습을 내보이는 금산도 아니고 말이다. 가족과 친구, 동료들이 있는 익숙했던 도시를 떠나 먼 남쪽 끝 동네에 내려와 가끔 가야 할 방향을 잃은 것만 같을 때면, 그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고개를 들고서 내 키보다 한참이나 높이 솟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이따 보면, 이상하게 금방 마음속 폭풍은 가라앉고 고요해졌다. 그 ‘할아버지’를 달리 부르는 말은 ‘당산나무’이다.
우리 마을 당산나무의 수종은 느티나무에 해당하며, 약 230년 수령이 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가치가 인정되어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당산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으면 기분 좋은 편안함이 맴돌아서 기분이 좋을 때나 우울할 때나 당산나무 그늘을 즐겨 찾은 지 3개월 쯤 지난 어느 날, 길에서 마주친 마을 사무장님으로부터 신신당부를 들었다. 며칠 뒤 저녁, 당산나무 앞에서 제사를 지내니 근처에서 소란을 피워서는 절대 안 되고, 당산나무 할아버지께서 꼭 소원 한 가지는 들어주시니 그날 밤엔 소원도 하나 빌어보라고 하셨다.
얼마 뒤 보름달이 뜨고 동제를 지내는 밤이 찾아왔다. 당산나무 앞에는 병풍과 함께 제사상이 차려졌다. 이장님은 하얀 소복을 입은 채 예의를 갖추고 계셨는데, 생각보다 더 엄숙한 분위기에 저절로 두 손을 모으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큰집에서 제사를 지내왔기에 제사상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았는데, 당산나무 앞에 차려진 제사상은 새삼 놀라웠다. 어촌마을답게 제사상에 올라온 생선 가짓수만 어림잡아 13가지가 되었다. 조용히 숨을 죽인 채 마을 어르신들이 제사를 지내는 풍경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는데, 하얀 소복을 입고선 이장님이 읊조리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보니 올 한해 마을에서 풍성하게 추수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다음 해의 풍년을 비시는 듯했다. 그 곁에서 나도 조용히 당산나무 할아버지에게 소원을 빌었다. 생업도 그만두고서 낯선 곳으로 이주해온 뒤 한 치 앞도 모를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말이다.
엄숙했던 제사가 끝난 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다 함께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늘 동제가 있는 밤에는 이렇게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을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함께 나눠드신다고 했다. 함께 음식을 나누며 마을 어르신들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옛날에는 당산나무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을 앞 바닷가에 가서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한 사람은 동제 앞뒤로 일주일 모두 그 어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도 못 간다고 하셨다. 또한 동제 전후로는 마을 분들도 제사를 이끄는 이장님 댁에 최대한 출입을 자제하신다고 한다. 여러모로 불편함이 따르는 데도 여전히 오랜 풍습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렇게 오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마을에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보름달이 떠서 유난히 밝았던 그날 밤이 여전히 생생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당산나무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 느끼게 된 또 다른 사건이 있었는데, 지난가을 마을의 축제 때였다. 마을 축제를 앞두고 보름간 매일 저녁,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북과 장구를 치며 축제의 문을 여는 농악 공연을 준비했는데, 드디어 마을 잔칫날이 찾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다들 단단히 복장을 갖춰 입고서 마을을 이리저리 돌면서 풍악을 울릴 참이었는데, 장구를 옆에 끼고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장구채를 쥐는 것 대신 당산나무 할아버지께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발맞추어 길을 밟아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누군가 당산나무 할아버지께 인사를 먼저 드리지 않고 마을에 시끄럽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이어 다른 어르신께서 먼저 당산나무 할아버지께 세 번 크게 절을 올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 따라 일제히 모두 당산나무 할아버지께 큰 절을 올렸다. 그제야 온 마을에 북소리와 장구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우리 마을의 가장 큰 어르신으로서 당산나무 할아버지의 존재를 다시 맘속에 각인하게 된 장면이었다.
초록빛에 더 짙은 초록이 더해지는 5월. 겨우내 휑했던 당산나무의 가지마다 초록 잎들이 무성해지고 있다. 이제 곧, 당산나무 아래에 서면 푸근한 그늘이 드리울 테다. 작년 여름, 나는 그늘 아래에서 나의 서른 번째 여름을 보냈다. 230년 동안 그 자리에서 변치 않는 모습으로 굳건히 서서, 오가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안식처가 되어주는 당산나무를 아래에 서면, 조급한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걱정들은 그저 가만히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 낯선 곳에서 외롭고 마음이 어지럽다면, 당산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 마을의 당산나무 할아버지 곁도 좋고, 남해에는 서른 그루의 다른 할아버지들이 곳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터뷰/
남성 / 1999년생 / 남해에서 나고 자랐다. 학업을 위해 타지 생활을 하다가, 현재는 고향에 머물고 있다.
Q1. 당산나무에 올리는 제사를 본 적이 있나요?
어릴 적에 딱 한 번 있어요. 보통 동제를 지낸다고 하는데, 제가 어렸을 적에도 그 당시 이장님이 소복을 입고 동제를 지냈어요. 제사를 지내는 날은 이상하게 항상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는 직접 제사 때 가서 본 적이 없어요. 아무래도 중요하고 신성한 자리니까, 부모님도 어린 제가 제사에 나오기보다는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길 원하셨어요. 고등학교 이후로는 학업을 위해 마을을 떠나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볼 기회가 없기도 했고요.
Q2. 어렸을 적 당산나무에 얽힌 특별한 기억이 있나요?
글쎄요. 제가 어렸을 적이나 지금이나, 당산나무는 항상 똑같은 모습인 것 같아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요. 아, 그런데 어렸을 때는 당산나무가 참 무서웠어요. ‘당산나무’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는 그저 큰 나무라고만 생각했는데, 신성한 나무라고 어른들께서 하시니까 더 다가가기 어렵고, 혹시 제가 나무에 상처를 냈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 나무 가까이에 잘 안 갔던 것 같아요. 간혹 당산나무 앞을 지나야 할 때는, 혼자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어렸을 적엔 그 나무가 나에게는 너무 큰 존재로 다가왔던 것 같다. 대신 아버지께서 당산나무 그늘 아래에서 라디오를 켜두고 그물 작업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았던 기억이 있다.
Q3. 당산나무 할아버지께 빌었던 소원이 있나요? 그 소원은 이루어졌나요?
늘 할머니의 건강을 빌었어요. 어릴 적에 부모님은 늘 배타고 나가셔서 안 계셨거든요.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서 언제나 할머니의 건강이 제겐 가장 큰 소원이어에요. 당산나무 할아버지가 소원을 들어준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할머니는 건강하셔요. 오래도록 그래주시면 좋겠어요.
Q4. 마지막으로, 당산나무는 본인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당연히 있어야 하는 존재? 늘 항상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 나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거나 크게 신경써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저 그 자리, 늘 같은 모습으로 서있으니까. 그런데 만약에 당산나무가 사라진다면, 허전할 것 같아요. 우리 마을에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는 거니까요. 꼭 마을의 중심이 비어버린 느낌이 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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